최태민 가족들이 말하는 대통령과의 40년 역사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국정농단 이야기가 쉴새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야기 마다 대통령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그들은 어떻게 한나라를 左之右之(좌지우지)했을까?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최 선생님(최순실)께 컨펌했느냐?"는 대화녹음에는 啞然失色(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국무총리,안기부장 등 고위직 인선에서 부터 최순실의 입김이 마구 먹혀들었다.

 

최태민 목사(1912.5.5-1994년5월.부인 임선이의. 무덤은 용인시 야산 약600평.대통령 묘역의 8배. 묘비 높이 2m.묘비뒷면에 순영,순득,순실,순천 정윤회 등 사위.손주 7명이 새겨져 있고(신고 되지 않은 묘임)현재에도 국화꽃이 생생하게 진열되어 누군가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었다.

 

1977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최태민을 조사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그러자 박근혜 대통령은 맘대로 해보라며 고함을 질렀다. 박정희 대통령도 육영수 여사도 박 대통령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이때가 최태민을 잡을 기회였었다. 하지만 6개월간 군부대에 휴양케 하고 막을 내려 대를 이은 그의 딸(최순실)로 엄청난 국정농단에 이르게 된다.

 

그때 그 고집이 "5천만 전 국민이 청와대 앞에서 내려오라 해도 절대 내려올 사람이 아니다(JP의 말)“라는 말이 실감난다.

1975년 육영수 여사 서거 후 최태민이 박 대통령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면서 역사가 시작된다."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기회 있으면 한번 만나주시길 바랍니다".즉시 만났다.

1980년 유신이란 말이 나와도 어려운때 최태민 고문만이 도와주고 위로했다.

 

최태민의 아들 조순재 씨의 녹취록에 의하면 사흘에 한 번씩 찾아왔다. 단둘이 독대하는 경우가 많았고, 둘이 들어갔다 하면 나오지 않았다. 밥은 문간에 갖다 놓으면 최태민이 가지고 들어갔다.

박 대통령을 가족에게 떼어 놓고 아들인 나도 접근을 못하게 했다.

박 대통령을 만난 한달 뒤 1975년 최태민은 대한구국 선교단을 조직하고 총재를 맡고 박 대통령은 명예총재를 맡았다. 이때 최순실을 만나게 된다.

 

조순재 씨는 "구국선교단 활동(1970)을 하면서 앞으로 박 대통령이 여성 대통령이자 아시아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정치적 야망을 자극했다.

구국선교단을 기초로 해서 성장하면 여성 대통령이 가능하다고 바람을 넣었다. 정치 입문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최태민이 사망(1994)하자 최순실은 "대학 1학년 때(1976) 흥사단 행사"에서 처음 봤다.

최순실은 처음 본 소감을 깨끗하고, 흐트러짐이 없고, 욕심도 없고, 물러 설 줄도 아는 사람이라고 느꼈다고 그의 넷째 부인 아들 최재석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최재석 씨는 육영수 여사가 살아 계셨을 때 두 번 청와대 들어가 가족과 식사를 했다

10.26 직후 합동수사본부 조서에는 공화당 중앙위원(1963.5월)을 지낸 것으로 나와 있었다.

박근령씨의 남편인 신동욱(공화당 총재)은 “육영수 여사도 최태민을 조심하라고 타일렀으며최태민과 최순실은 추울 때 바람막이로 다가왔다가 어느새 피부가 돼버렸다"며 박근령씨가 최태민을 내보내자고 하자 박 대통령은 "최태민을 언급하면 천벌을 받는다"며 그를 감쌌다고 했다.

 

박근령, 박지만씨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이들을 떼어내 달라는 탄원서"를 냈다.

탄원서에는 최태민은 박정희 전 대통령 유족을 중심으로 마련된 각종 육영사업, 장학재단,문화재단 등 추모사업체에 깊숙히 관여해 회계장부를 조작해 부를 축척했다는 것이다.

1983년 이후 강남에 수백억 원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최재석 씨는 "당시 자택에는 별도의 내실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어 박근혜 대통령이 자택을 방문할 때마다 최태민과 함께 내실에 들어가 둘이서만 머물렀다"고 말했다.

최태민의 역삼동 자택(약200평)에는 부인 임순이와 최순실이 거주했고 비밀 아지트(8평)도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빈번하게 방문했던 장소에는 금은 보화가 가득찼고, 한 면을 채운 금고에는 수백억대 양도성 예금증서와 골드 바 같은 귀금속, 수천억 원대 땅문서 등이 가득했고 지하(약 100평)에는 운보의 작품 등 수천만 원대의 그림(400여점)이 가득 찼고 또한 "재산의 상당부분이 현금화돼 해외로 빠져 나갔으며 나머지 동산은 구리쪽에 있는 최씨 일가의 안가에 묻혀있는 걸로 안다"고 말했다.

 

2016. 11. 23 ( 한마디 : 몸은 비록 가까이 갈수 없지만 마음이 가있는걸 어찌할꼬! )

글쓴날 : [16-11-26 09:22] 이종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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